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게하는 기도를 하자 본문 거지의 영업 전략(?)은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는 것이다. 일본의 어느 거지는 아침에 거지복장으로 출근하여 구걸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가곤 했는데, 집으로 따라 들어간 어느 기자가 방안을 둘러보고 놀랬다고 한다. 집에는 어느 집과 다를 바 없이 없는 것 없이 갖추어 놓고 잘 살더라는 것이다. 이 사람은 구걸이 자신의 직업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일터(?)로 출근하면 빛이 바래고 꾀죄죄한 복장으로, 머리를 쳐 박고 손을 내밀어 동정을 받는 게 그의 직업이었던 셈이다. 그보다 더 놀란 일은 중국의 한 거지의 일화이다. 그 거지는 다리 하나가 장애를 입은 것처럼 보였는데, 어떤 이와 논쟁이 붙어서 싸우다가, 그가 도망가자 두발로 뛰어서 쫒아가는 장면을 캠코더로 찍어 인터넷에 올라온 것을 본 적이 있다. 원래 그는 불구자가 아니었지만 최대한 불쌍하게 보이려고 일부러 불구자 행세를 했던 것이다. 여자거지는 어린 아이를 안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인데, 아기가 없으면 다른 사람에게 아기를 빌려와서 안고 있는 거지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거지는 사람들에게 최대한 불쌍히 보여야 구걸이 잘되기에, 수단방법을 가지지 않고 불쌍히 여기려고 애쓰는 모습이 처절하다.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눅18:38,39)) 맹인 바디매오는 실명을 하여 구걸을 하며 살았다. 그런데 그는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러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일화이다. 각종 삶의 문제나 고질병을 가지고 이를 해결하려고 예수님을 따라다닌 사람들은 수천명에 이르렀을 것이지만, 그 중에서 소원을 이룬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운이 좋아 예수님의 눈에 띤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가서 예수님께 동정을 호소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맹인은 눈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라다닐 수도 없으므로 문제를 해결할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한다. 물론 사람들로부터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중풍병자가 회복되며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소식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웅성거리며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아무나 붙잡고 누구냐고 물어보니까, 예수님이 지나간다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예수님이 어디 계신지도 몰랐지만, 젖 먹던 힘을 다해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이 시끄럽다고 그를 꾸짖기 시작했다. 그러자 더 큰 소리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마침내 그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이 사건을 읽으면서 어떤 마음이 드는가? 소경 바디매오가 누가복음에 나오는 불의한 재판관을 따라다닌 과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드는 게, 비단 필자만의 생각일까? 소경 바디매오는 예수님이 자신의 곁을 지나가는 사건이 일생에 한번 올까 말까하는 천금의 기회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래서 그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다. 남들이 뭐라 할수록 더욱 그 기회를 움켜쥐었다. 기회를 잡은 방법이 바로, 예수님을 향하여 불쌍히 여겨달라고 소리 지르는 행위였다. 바디매오는 사람들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불쌍히 여김을 받는 것이 얼마나 귀중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가 맹인이 아니었다면 다른 말로 부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놀라운 힘이 있는 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평생 구걸하면서 터득한, 그만의 깨달음과 통찰력 덕분이었을 것이다. 그가 소원을 이룬 동력은 자신에게 닥친 천금의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았고,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의 힘을 사용했던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만 있다면, 천국의 자격은 물론이고 이 땅에서도 평안하고 형통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이 오고 고단하고 팍팍한 삶의 문제도 단박에 해결 받을 것이다.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만 있다면 말이다. 아니라고? 성경을 찾아보라. 예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사람은 그들 앞에 놓인 문제가 즉각 해결되었다. 부탁하지 않은 사람들조차 포함해서 말이다. 나인성 과부는 하나뿐인 외아들의 죽음이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이스라엘 시대의 경제적인 능력은 죄다 성인 남자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과부는 고아와 외국인과 더불어 극빈층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외아들의 죽음은 그에게 청천 벽력같은 사건이었다. 그런데 죽은 아들을 실은 관을 멘 장례행렬이 우연히 예수님의 곁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눈물을 훔치던 과부의 눈과 예수님의 눈이 마주쳤다. 그 슬픈 눈이 예수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아들이 관에서 살아나는 기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그 슬픈 눈을 불쌍히 여기셨던 것이다. 그 과부는 예수님에게 죽은 아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이 그녀를 불쌍히 여겼기에 입이 쩍 벌어지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장면이 바로 나사로의 사건이다. 죽은 지 오래 되어 악취가 풀풀 나는 무덤 앞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고 소리쳐 살아하게 했던 사건 말이다. 그 장면에 앞서, 예수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신 장면이 성경에 소개되어 있다. 이처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긴 사람은 죄다 죽은 사람도 살아났다.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이 당신을 불쌍히 여긴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 어렵지 않게 알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거지 바디매오가 소원을 이룬 방식을 따라하면 된다. 기도할 때마다 간절하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외치면 된다. 굳이 큰 소리로 외치지 않고 마음속으로 해도 된다. 그러나 간절히 해야 한다. ‘간절히’ 라는 말과 비슷한 단어는, 혹독하게, 전심으로, 몸부림 쳐가며,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죽기 살기로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불꽃같은 눈동자로 살피시는 분이시다. 거지 바디매오는 사람들이 책망하든 상관없이, 자신에게 굴러온 천금의 기회를 움켜쥐고 빼앗기지 않았다. 그리고는 간절하게 불쌍히 여겨달라고 큰소리로 외쳤던 것이다. 당신은 무슨 문제로 어깨를 늘어뜨리며 좌절하고 낙담하고 있는가? 불치의 병인가, 사업의 실패인가, 취직이 안 되어서인가, 직장에서 해고되었는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인가? 필자는 당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몰라도, 죽은 사람을 살아나게 하고 맹인이 눈을 뜨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당신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면 단박에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과 밤에 시간을 내어 간절하게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하고, 낮에도 틈만 나면 전심으로 불쌍히 여겨 달라는 기도를 무한 반복하라. 문제가 해결되고 기도의 응답이 올 때까지, 쉬지 말고 전심으로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는 기도를 계속하면 된다. 그러면 당신에게도 놀라운 사건이 벌어지는 날이 올 것이다. 평생 잊지 못하는 일이 당신 앞에 서 드러나는 일이 생길 것이다. 나중에 그런 사건이 생기면 필자에게도 알려주길 바란다. 필자도 당신과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으니까 말이다. 출처 :크리스천 영성학교 관리자 조회 4,056회 2014-10-18 17:10 목록 댓글목록 이전글 나는 예수님의 팬인가? 제자인가? 14.10.18 다음글 제5회 새생명축제 태신자이름봉헌 14.09.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