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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에서의 부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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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가정에서의 부흥 작 성 일 2006-12-04 21:42:17
 
작 성 자  K. H.    조    회
 
 

수 천 년 전에, 우리가 아는 한도 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동산에 한 남자와 여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그의 창조자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으므로 모든 피조물과 그들 상호간에 조물주를 계시하여 시간 시간을 주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았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조물주 앞에서 피조물로서의 그들의 위치를 달게 받아드리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던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하고 그의 뜻에 전적으로 순복하는 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들은 언제나 그들의 뜻을 하나님의 뜻에 순복시키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살지 않고, 조물주를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들 자신 사이에 있어서도 서로 순종하는 생활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아름다운 동산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진 첫 가정에는 절대적인 조화와 평화와 사랑과 연합이 하나님과만 이루어졌을 뿐 아니라 사람 사이에도 서로 이루어 졌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하나님 중심의 이 가정에 뱀이 들어와서 사람과 함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 조화는 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님과의 화평과 교제를 잃을 뿐더러 바로 그 때문에 사람끼리 있었던 조화조차도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하나님을 위한 생활을 그 이상 계속하지 않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이제 그들 자신이 자신들의 신들이 되었습니다.
참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는 그들의 생활은 서로 서로를 위하여 사는 생활도 계속 할 수 없게 하였습니다. 평화와 사랑과 화목 대신에 불화와 증오 속에서 다른 말로 하면 죄 가운데서 살게 되었습니다.

부흥은 가정에서 시작

죄가 처음으로 들어온 곳은 가정이었습니다. 우리가 제일 많이 죄를 짓게 되는 곳은 아마도 가정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맨 처음으로 부흥이 필요한 곳은 가정인 것입니다. 교회 적으로나 국가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부흥은 절실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부흥되지 않고 교회가 부흥된다면 그것은 완전히 위선인 것입니다. 시작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 가정이요. 가장 희생이 요구되는 곳도 가정입니다. 그러나 또한 부흥이 가장 필요한 곳도 가정인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무엇보다도 먼저 참으로 부흥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그것은 단순히 영적 생명이 쇠퇴한 마음속에 새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자기 노력이며, 자기를 시초로 한 활동에서 오는 새 생명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니요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를 채워 주시고 우리를 통하여 넘쳐흐르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은 우리와 함께 사는 모든 사람들과 교제하며 하나가 되는 것으로 표시되는 것입니다. 즉 우리와 하나님 측의 사이를 아무 것도 가로막을 수 없고 우리와 딴 사람 사이에도 아무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이런 사실들을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도 먼저 경험하여야 할 장소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자라고 말하는 많은 사람이 얼마나 이와 판이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일까요. 약간 성이 난다거나, 다투는 성미, 자기 고집, 원망, 등등... 말하자면 우리들 사이에 어떤 분명한 이간이 생긴 것이 아닌 경우까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살면 마땅히 가져야 할 완전한 결합과 교제가 결핍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과 다른 형제들 사이에 무엇이 끼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곳 마찬가지의 것들이 우리와 하나님과의 사이 에 이미 끼어있음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방해하고 따라서 우리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넘쳐흐르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에서의 그릇됨 점

그러면 우리 가정에서 본질적으로 잘못된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정에 대해서 말할 때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형제 자매 혹은 여러 가지 환경으로 함께 살게 된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존재하는 상호관계를 의미하게 됩니다. 많은 가정에서 찾을 수 있는 그릇된 점의 첫째는 가족끼리 서로 마음 터놓고 살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서로 병풍을 치고 그 속에 숨어살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참 모습을 모르고 있고 또한 우리는 그들이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지도 않는 것입니다. 우리와 가장 친근한 관계를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우리들 마음속에 일어난 일들, 말하자면 우리의 어려움이나 고민하는 문제 또한 실패 당한 일들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 자주 우리를 깨끗케 씻어 주시는 일까지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투명치 못한 이러한 생활 그늘 속에 숨은 이러한 생활은 모두 죄의 결과인 것입니다. 맨 처음 저지른 죄의 첫 결과는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동산의 나무 뒤로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과 또한 인간들 사이에 아무 감추인 것 없는 투명한 생활을 하던 그들이 죄 때문에 하나님을 피하여 숨게된 것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었다고 할 것이면 그들은 곧 피차간에도 피하여 숨었을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마음속에는 결코 하와에게는 알릴 수 없는 반응과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후, 이런 경향은 지금까지 변함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몰래 어떤 것을 숨겼으므로 우리 피차간에도 또한 서로 숨기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가면(假面) 역할을 하는 서로 막힌 담 속에 참된 자아의 모습을 숨기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농담같은 형식을 취해서 가장 비상한 방법으로 우리를 숨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가까이 와서 우리의 본체를 보는 것이 무서워서 참된 이야기를 피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속이기 내기를 계속하여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에게 진실하지 않습니다.
아무도 진실하지 않은 사람과는 교제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에서의 결합과 밀접한 교제는 불가능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어두움에 거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무엇이고 숨기고 말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결핍

우리 가정에서 둘째로 그릇된 것은 피차 참된 사랑이 결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래요? 그것은 우리 가정에는 없는 일이지요. 우리 가정에서 남편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지극하기 때문에 어떤 집안도 우리 집만 못할 것입니다"라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잠시 생각해 보십시요. 그것은 여러분이 생각하고 있는 사랑이 참으로 어떤 것인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사랑은 다만 기분에 좌우되는 감정산도 아니요, 강력한 열정도 아닙니다. 고전 13장에 있는 우리의 잘 아는 말씀은 참 사랑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자신을 시험하여 본다면 우리는 참으로 피차 거의 사랑하고 있지 않을 뿐 더러 우리의 태도는 항상 사랑의 정 반대 방향 즉 서로 미워하면서 살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 구절이 말해주는 사랑에 대해서 한번 같이 살펴보기로 합시다.
"사랑은 오래 참고(인내)
사랑은 온유하며 (따뜻하고 부드럽다)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시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자기를 나타내지 않는다)
교만하지 아니하며(남을 얕보지 않는다)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예의 바르게 행동한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남을 먼저 생각한다)
성내지 아니하며(신경질을 내치 않는다)
악한 것을 생각지 않는다(남에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다)"

우리 가정은 이러한 시험에 머리를 들 수 있을까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경우에 사랑의 길에 반대되는 행동을 합니다. 우리는 피차간에 인내심이 없고 우리가 무슨 문제에 대해서 답변을 하던지 혹시 어떤 일을 다시 하게 될 때에 있어서도 불친절합니다.
우리 가정에는 또한 시기하는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남편이나 부인은 각각 달리 타고난 성품을 시기하고 심지어는 영적 성장을 하는 일에 있어서까지도 시기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때로 자녀들에 대하여 시기하는 때가 있습니다. 형제간에 혹은 자매간에 무섭게 시기하며 싸우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한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즉 이것은 예의에 대해서 말씀한 것인데 이것은 어떻습니까. 예의는 작은 일에 있어서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작은 일에 우린가 얼마나 자주 넘어집니까. 그리고 우리는 가정에서만은 이런 예의 없이 잘 살아가는 줄 알고 있는 것입니다.
"교만한 것" 즉 자부하지 않는 일에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때때로 교만하지 않습니까? 이 교만은 우리의 모든 방면외 모든 일 가운데서 드러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모든 것을 제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일이든 자기 고집을 부리고, 잔말을 하며, 다른 사람 위에 서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잔말이나 남의 위에 서려는 노력은 결국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경향으로 인도합니다. 우월감을 가진 이러한 태도는 자기를 남의 위에다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어떤 사람을 멸시할 때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남을 비난하고 싶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고 생 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즉 이기적인 것을 버려야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하루 동안에도 여러 번 우리는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이익을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지 않습니까.
얼마나 우리는 쉬이 성내었습니까. 다른 사람과 어떤 일로 상종할 때 얼마나 속히 성내었습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이 한 일이나, 하다가 남긴 일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불친절한 생각과 노한 감정을 품었습니까! 이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 가정에는 사랑의 결핍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매일 계속되고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은 사랑의 정반대의 일이요, 사랑의 반대는 미움인 것입니다. 참지 못하는 것은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시기하는 것도 미움 때문이요, 자부심과 자기 뜻대로 하려고 자기 주장만 하는 것도 증오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기주의와 성급히 서두르는 것과 분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이 미워하는 것은 죄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하며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두운 가운데 있는 자라". 미워하는 것이 모든 긴장과 장애와 불화의 원인이 되고 하나님과의 교제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즐길 수 있는 교제도 불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유일한 해결책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쎵내가 우리 가정에서 새로운 생활과 부흥을 원하느냐쎵하는 데 달려있습니다. 나는 친히 이 문제에 대하여 분명한 태도를 가져야 되겠습니다. 과연 나는 우리가정에서 이런 상태가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또는 새로운 생활, 즉 주님의 생명이 우리 가정에서 약동하시기를 갈급한 심령으로 원하고 있습니까? 왜냐하면 이런 일에 대하여 참으로 갈급하지 않는 한 이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필요한 계단을 밟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첫 계단으로서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은 죄를 죄라고 인정하는 것입니다(그것은 물론 자기의 죄를 말함이요 다른 사람의 죄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이 죄를 십자가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주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죄에서 깨끗케 함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 밑에서 우리의 고개를 숙일 때, 주님이 자신을 잊고 남을 사랑하심과, 그의 오래 참으심, 그리고 그의 관용이 우리 마음속에 스며들어 차고 넘칠 것입니다. 주님의 보배로우신 피가 우리의 모든 "사랑치 않는 것"과 악한 의지를 깨끗이 씻어주실 것이요, 성령께서 주 예수님의 그 성품으로 우리에게 채워 주실 것입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은 우리 주님의 성품이요, 그것은 우리에게 거저 주신 선물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만일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그의 성품도 우리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복된 과정은 언제든지 죄가 생기려는 순간마다 또는 사랑의 결핍이 스며들려는 순간마다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왜냐하면 언제든지 우리는 주 예수님의 피의 깨끗케하여 주시는 은사를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은 우리의 가정 생활을 십자가의 길로 분명히 인도하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거듭 거듭 우리는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그의 권리를 포기하신 것 같이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포기하여야 할 장소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기주의나 교만한 행동에 대하여 우리는 날카로운 반응을 표시할 때가 많습니다만 "십자가"의 길을 걸을 때 이것은 우리의 희생을 원하지 않는 나 자신의 이기주의요 나 자신의 교만으로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나 행위에 접할 때마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 우리를 행하신 뜻으로 받아들여 겸손하게 하나님의 섭리에 머리를 숙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결코 다른 사람이 자기 본위로 나아가는 것이 그 사람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 관하여 말한다고 할 것이면 필요에 따라서는 우리의 마음이 부서져만 있다면-우리들을 통하여 그들의 필요한 것을 도와주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분명히 우리가 부모의 자리에 서 있을 때 우리는 때때로 엄격한 태도로써 우리의 아이들의 잘못을 고쳐 주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이 결코 자기 본위나 이기심에서 생긴 언행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다만 남을 사랑하고 그들이 잘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의 편의나 권리는 언제나 포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주 예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될 것이요, 우리를 통하여 그 사랑을 표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갈보리"에서 산산히 우리 자신을 깨뜨리고 넘어질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바로 잡아야 할 것입니다. 때로는 어린 아이들과의 관계에 있어서까지 말입니다. 다른 사람과 올바른 관계를 가졌는가 아닌가하는 것으로 우리가 부서졌는가 부서지지 못하였는가가 표시될 때가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부서졌다는 것은 완고하다는 것의 정반대입니다. 굳은 심정은 말하기를 쎵그것은 네 잘못이다쎵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서진 심령은 말하기를 쎵그것은 내 잘못이다쎵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가정에서 후자의 말을 한다고 할 것이면 얼마나 좋은 분위기를 만들 것입니까! 그리고 전자의 말을 할 때와 얼마나 차이가 있겠습니까? 십자가에는 한 순간 한 사람 밖에 설 자리가 없음을 기억하여야 할 것입니다 .
쎵나도 잘못했다. 그러나 너도 또 잘못한 것이다. 그러니 너도 나와 함께 십자가에 가야된다쎵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결코 그럴 수는 없습니다. 당신은 단독으로 나와서 쎵내가 잘못했습니다쎵라고 말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 하나님께서 당신의 행위나 말보다는 당신의 부서진 심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다려야 할런지도 모릅니다. 아마도 오랜 세월일런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더욱 완전히 깨닫게 하여 줄 것입니다.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든 일들을 옳바르게 바로 잡으시기 위하여 천 구백 여년 전에 그처럼 위대하신 일을 이루신 이후 그는 참으로 오래 참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의 기도를 응답하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갈보리까지 인도하실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가로막고 있는 가운데에 있는 벽은 파괴 될 것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참 빛 가운데 예수님과 또 다른 형제들과 같이 걸을 수 있고 피차 깨 끗한 마음으로 열 정적으로 사랑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죄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공통적으로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가 깨끗케 씻음을 받는 주 예수님의 발 아래야말로 우리들이 하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자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보리에서 두 세 사람의 죄인이(혹은 그이상일 수도 있겠습니다) 머리 숙여 하나가 된 그림이야말로 우리들의 참된(신도의) 연합을 반영하여 주는 것입니다.
관리자 조회 5,445회 2013-05-10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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