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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론과 진화론의 의미 4.

본문

창조론과 진화론의 의미
1. 창조와 진화의 논쟁이 정말 중요합니까?

앞으로의 논의를 위하여 먼저 ‘창조’와 ‘진화’의 정의를 내리는 것이 필요하다. 창조와 진화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다양하므로 어느 하나로 한정짓기는 매우 힘들지만, 여기서는 편의상 다음과 같이 광의로서의 창조와 진화를 정의하고자 한다. 즉, 창조란 이 우주 만물과 모든 생물들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활동에 의하여 탄생되었음을, 그리고 진화란 이 우주 만물과 모든 생물들이 자연적인 과정으로 탄생되었음을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자.
어떤 사람은, 만물이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저절로 진화했건 하나님에 의해 초자연적으로 창조되었건 아득한 옛날에 일어난 일이 뭐 그리 중요한 문제냐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기원에 관한 개인의 신앙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본질적인 의미와 궁극적 운명에 관한 견해를 크게 좌우하기 때문이다. 즉, 기원에 대한 인간의 입장은 그의 세계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오늘날 인간의 직면한 문제들-사회적, 정치적, 인종적, 생태학적-은 인간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인데, 이러한 인간 행동은 세계관의 표현, 즉 세계관의 역동적 표출 과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의 세계관이 공해산업도 괜찮다면 자연이 오염될 것이며, 인종주의가 옳다고 하면 그는 인종을 차별하는 자가 될 것이다. 이렇듯 문제들과 행위는 세계관의 표출이고, 세계관은 바로 기원관과 밀접히 관계한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은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 변화를 필요로 하고, 올바른 세계관은 기원에 대한 바른 입장을 요구한다.
한 개인은 근본적으로 기원에 대한 두 가지 입장 중 하나를 택할 수 있다. 하나는 창조주가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창조주가 없다는 것이다. 즉, 유신론 대 무신론(혹은 유물론, 자연주의:보이는 물질만이 실체의 모든 것이다), 그리고 계획 대 우연의 양자 택일이다.[1] 그렇다면 이러한 양자택일에서 ‘진화론’은 과연 어디에 속하는 것인가? 엄밀히 말하자면, 생물학의 진화론은 ‘기원론’도 아니고 ‘무신론’도 아니다. 왜냐하면, 자연선택의 기작(機作)이 적용되려면 최소한 번식 가능한 생명체가 이미 존재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론의 함축적 의미는 너무나 깊이 여러 학문에 침투해 있고, 그 범위도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어서 생물 종의 기원뿐만 아니라 최초 생명체의 기원, 그리고 우주의 기원까지도 우연적이고 자연적인 과정만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연주의적 믿음을 제공해 주고 있다. 즉, 진화론은 싫든 좋든 간에 이미 자연주의적 세계관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는 셈이다. 그러므로 ‘창조와 진화’ 논쟁이야말로 모든 세계관 논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 창조와 진화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습니까?

생명체가 외계에서 유입되었다는 학설이 있지만, 이러한 학설은 본질적으로 생명의 기원에 관한 창조-진화의 논의를 지구 밖으로 옮긴 것에 불과하다. 즉, 우주에서 생명체가 유입되었다 하더라도 그 근원에서는 결국 창조냐 진화냐의 문제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기원에 대해서도 창조냐 진화냐 문제 이외의 다른 대안은 없다.[2] 혹자는 유신론적 진화론을 대안 또는 타협안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이는 우주는 처음에 신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그 이후는 진화에 의해 오늘날의 우주와 생명체가 탄생되었다는 입장으로 진화를 단지 메커니즘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신론적 진화론이 기독교적 관점에서의 진정한 대안이 되려면 과학적 판단기준뿐만 아니라 신학적 판단기준에 의해서도 인정받아야 할 것이다(Q3 참조).

[2] 창조론과 과학
1. 진화는 과학이고 창조는 신앙이 아닙니까?

우주의 기원에 관해서는 진화 모델과 창조 모델이라는 단 두 가지의 기본적인 모델밖에는 없다는 것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들은 계속되는 자연주의적인 과정에서 발전되었든지, 혹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의 하나이지 제삼의 선택의 여지는 없다. 그 각 모델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세계관, 곧 삶과 의미, 그리고 기원과 운명에 대한 철학이다. 그 각각은 과학적 방법에 의하여 확증되거나 거짓으로 판명되거나 할 수 없다. 이는 그것들이 경험적으로 시험되거나 관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것을 택하든지 그것은 개인적인 신념이나 믿음을 근거로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각각은 또한 과학적인 성격을 띤다. 왜냐하면 그 각각은 그 자체의 틀 속에서 과학과 역사의 모든 자료들을 설명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창조론은 적어도 진화론보다는 비종교적이며 또한 창조 모델이 진화 모델보다 참된 과학의 사실들에 잘 부합된다고 창조론자들은 역설한다. 창조론이 유신론적 모델인 것은 사실이지만, 진화론이 무신론적이거나 최소한 이신론적 모델인 것 또한 사실이다(왜냐하면 진화론은 모든 것을 창조주 없이 설명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유신론이 종교적 신앙이라면 무신론도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이 둘은 얼마든지 정반대의 위치에서 서로 대비될 수 있는 체계이기 때문이다. 진화론이나 창조론이 과학적 실험으로 증명될 수는 없지만 기존의 과학적 법칙과 사실로 미루어 어느 이론이 과학적으로 더 타당한지 판단할 수는 있다. 이런 과학적인 고찰 방법으로는 수학확률론적, 생물학적, 열역학적, 지질화석학적 방법 등이 있는데 이런 방법을 통해 볼 때 진화론이 얼마나 비과학적인가와 진화에 대한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과학적 증거가 거의 없음을 알게 된다. 즉, 진화론은 검증되지 않은 가정에 근거한 믿음 체계이며 또한 하나님을 애써 거부하고자 하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기인한 철학체계이다.[4,5]

2. 과학을 연구하는 과정은 완전히 객관적입니까?

최근까지만 해도, 과학자는 객관적이라는 대중적인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 견해에 의하면 대상과 분리되어 감정을 배제한 연구자가 냉정한 논리와 관찰을 통하여 방법론적으로 과학적 문제들을 해결하며 새로운 사실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모든 지식의 습득은, 지식을 습득할 때 그를 자극하고 인도하는, 증명되지 않는 결단의 틀(세계관) 안에서 이루어진다. 한 인간의 세계관은 궁극적인 가정들(우주는 질서정연하다)로부터 일상적인 확신(내일도 태양이 뜰 것이다)에 이르는 광범위한 신념들을 포함한다. 과학을 포함한 모든 분야의 연구에서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은 지식습득의 동기를 부여하며 그것을 통일시키는 요소이다. 앎의 과정은 단순히 이지적인 것뿐만 아니라 감정적, 의지적, 영적, 신체적 차원의 일부를 구성한다. 우리의 지식은 물리적인 실체에 대한 관찰뿐만 아니라 역사적 사건과 다른 사람과의 관계까지도 포함한다. 이런 면에서 과학적 지식은 지극히 인격적이다. 연구는 결코 대상과 격리되어서 감정이 배제된 것이 아니다.[7]

3. 과학주의(scientism)란 무엇입니까?

과학적 방법론의 도입으로 인한 폭발적 지식의 증가와 이로 인한 문명의 급속한 발전은 사람들로 하여금 과학 그 자체에 대한 어떤 신성이라고 할 만한 것을 부여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곧 과학주의(scientism)이다. 과학주의의 주장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모든 신념들은 경험이나 실험, 즉 과학적 방법에 의해 검증되어야 하며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둘째, 계량화된 것만 과학에 의해 알려질 수 있으므로 오직 측정 가능한 물리적 실재들만이 알려질 수 있다. 셋째, 과학은 전제가 없으며 객관적이다. 즉, 과학은 주관의 여지가 전혀 없는 순수 객관적인 학문이므로 무전제에서 출발한다. 넷째, 모든 우주는 기계적이며 인과율의 사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은 결정되어 있다. 다섯째, 과학은 자기의 고유한 방법론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다. 여섯째, 과학적 방법만이 진리에 이르는 참된 방법이므로 다른 모든 학문도 과학적 방법으로 하여야 한다.
위의 과학주의의 주장들은 외적으로 보면 탈가치화, 객관화, 계량화 등을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가치와 주관이 전혀 섞이지 않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첫째 주장은 실험주의이며, 둘째 주장은 유물주의이며, 넷째 주장은 결정주의이며, 다섯째 주장은 진보주의이며, 여섯 번째 주장은 방법론적 환원주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근본적으로 과학주의는 존재론이나 인식론에서는 자연주의를, 내용에 있어서는 합리주의를, 정신에 있어서는 휴머니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을 요약해 보면, 과학주의란 인간이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삭감하고 인간 자신의 자율성을 바탕으로 이론을 구축하는 데서 나온 자연스런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기독교인 과학자는 팽배한 과학주의에 대해 특히 주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는 과학주의는 과학의 결과가 아닌 과학에 대한 신앙이며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가치에 대한 하나의 견해이기 때문이다.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 그것도 기독교 신앙에 반대되는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다. 과학주의가 성경과 상치되는 종교적 주장이라면 기독교인 과학자는 과학에서 과학주의 대신 성경적 입장을 취해야 합당할 것이다.[8]

4. 현대과학은 성경을 반대합니까?

이 질문은 아주 근본적인 물음으로 창조과학회의 사역이 시작하게 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모든 영역에서 성경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기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특히 미국과 같이 과학이 발달한 나라일수록 더 심한 모습을 보여준다. 과학의 영향을 받아 성경에 대한 불신이 시작된 것은 19세기부터 대두된 동일과정설(Uniformitarianism)과 진화론(Evolution)의 영향이 가장 주요한 원인이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경적 진리라는 절대 기준을 대치하기 시작했다.
동일과정설과 진화론에 의해 왜곡된 과학과는 달리, 사실 진정한(true) 과학은 항상 성경을 지지해 왔다. 지금까지 성경을 공격해왔던 것은 과학이 아니라 과학주의였다. 과학주의란 과학의 한계를 넘어서 과학이 접근할 수도 없는 부분까지 가정에 의해 설명을 시도하려는 의도에서 온 이론이다. 사실상 '과학(Science)'은 '지식(Knowledge)'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직접적인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우리가 정확하게 확증할 수 있는 것만을 과학의 범주에 포함시켜야 된다. 따라서 '과학적인 방법”은 당연히 실험에 의한 확인을 거쳐야 한다. 그러므로 과학은 지금 존재하는 세계의 과정만을 다룰 뿐이며, 어떠한 역사이전의 사건이나 과정들, 또는 미래의 사건이나 과정은 과학의 영역 밖에 있다.
많은 과학자들은 현재의 일어나고 있는 모든 과정은 영원히 일어난다고 가정하여 현재 존재하는 것으로부터 과거나 미래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현대과학을 지배하는 '동일과정설” 이라는 가정 또는 철학(과학이 아니라)이고, 이로부터 자연계의 모든 것이 저절로 발생하여 진화되어 왔다는“진화론”을 탄생시켰다. 그러나 이 두 이론(theory, 과학적으로 결코 증명 된 적이 없는 이론)은 자연의 근본적인 법칙(law, 과학적으로 증명된 법칙)에 어긋난다. 바로 열역학 제1법칙과 열역학 제2법칙이다. 이 두 법칙은 자연 세계의 모든 현상에 포함된 '에너지”에 관한 법칙으로,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에너지 교환을 지배하는 기본 법칙이다.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법칙으로 모든 에너지는 총량이 절대 변하지 않기에 어떤 물질을 포함한 어떤 에너지도 '무’에서는 생길 수도 없고 이미 생긴 에너지는 소멸될 수도 없다는 법칙이다. 따라서 현재 이미 존재하는 물질과 에너지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전제하고 있다. 열역학 제2법칙은 에너지 쇠퇴의 법칙으로 모든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에너지가 쇠퇴한다는 법칙이다. 자연계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 이 두 법칙의 범주를 벗어나는 경우는 결코 없다. 그래서 모든 과정에서 에너지는 보존되고 쇠퇴되지 창조되거나 소멸되지 않는다.
성경은 실제로 과학에 의해 불신의 대상이기보다 현대과학을 예상하여 왔다는 표현이 옳다. 이 근본적인 두 법칙은 19세기 과학자들에 의해 확인되었는데 수천년 전에 쓰여진 성경의 내용이 이를 정확히 뒷받침하여 준다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의 창조 이 후 피조세계는 열역학 제1법칙의 범주 안에 있음을 말해준다. '이는 엿새 동안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출애굽기 20:11). '모든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finished)'(히브리서 4: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all things)을 붙드시며'(히브리서 1:3) 라고 말한다.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니라(completed)'(창세기 2:1) 그래서, 그는 창조사역을 마치시고 더 이상 창조하지 않을 뿐 아니라, 소멸시키시지도 않으신다.
열역학 제2법칙은 어떠한 틀(시스템) 안에서는 물질이 쇠퇴되는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을 설명하는 법칙으로 모든 것은 시간이 감에 따라 낡고, 헤지고, 달아 없어지고, 결국에는 죽는다. 에너지는 항상 무질서한 방향으로 변하고 결국에 더 이상 사용 될 수 없게 된다. 정돈된 상황은 모두 시간이 지나면 항상 무질서한 쪽으로 진행되게 되어있다. 모든 자연상태에서는 '엔트로피”(무질서도)는 증가하므로 복잡한 구조는 깨어지고 단순해지려는 경향으로 나간다. 의도적인 메커니즘이 개입되지 않는 한, 밖으로부터의 에너지 공급은 무질서의 속도를 더 증가시킬 뿐이다. 그러나 진화론과 동일과정설은 이와 역행하는 점점 조화되는 해석을 한다.
열역학 제1법칙이 의미하는 것처럼 현재의 존재하는 모든 만물은 보존되고 있는 것이지 창조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열역학 제2법칙의 쇠퇴되고 있는 만물들은 창조적인 과정들에 의해서 시작되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므로 그 시작은 과학으로 접근이 불가능하고 우리가 배워왔던 어떤 것도 창조자 자신을 계시, 즉 드러내지 않는 한 도달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유일한 해답을 말해주는 성경 말씀과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법칙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시니라” (창세기 1:1)
[3] 창조론과 기독교
1. 창세기에 나오는 창조이야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아니면 상징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기초가 튼튼하고 안전할수록 그 건물도 그러하다. 그러나 이 기초가 무너진다면 그 건물 모두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모든 교훈은 성경적 창조에 기초를 두고 있으며, 성경의 모든 교훈은 창세기 1장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성경은 성령의 인도하심 하에 쓰여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정확무오한 하나님 말씀의 첫 번째 장이 창세기 1장이다. 즉, 창세기 1장의 창조이야기를 설화나 상징적인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성경 자체뿐만 아니라 기독교 신앙 전반에 걸친 불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 지극히 중요한 창세기 1장에 계시해 놓은 것들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과 그것들을 온 마음으로 믿는 것은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9]

2.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땅과 수면은 창조 이전인데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창 1:1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이미 하나님의 창조가 선포되고 있다. 이 첫 번째 구절이 단지 창조의 큰 제목이고 2절은 창조 이전의 상태를 나타내며 3절부터 하나님의 실제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며, 1절에서 창조하셨지만 사탄이 타락하여 2절의 혼돈 상태가 발생했고 3절부터 '재창조'가 있었다는 견해가 있는데 모두 신학적으로 문제점이 있다. 그러므로, 창 1:1절에서 이미 하나님의 창조가 시작되었고 2절은 창조된 우주와 지구가 아직 질서 있게 배치되지 않은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창조주간에 일어난 창조사역의 순서나 방법 등에 대해서는 이 외에도 많은 의문이 제시되고 있다.【그림1-2 참조】 예를 들면 태양은 넷째 날 창조되었는데 그 이전인 셋째 날에 식물이 창조된 것이나 일월성신이 없었던 첫째 날 창조된 빛의 본질, 태양과 달이 없었던 처음 사흘간의 아침과 저녁의 구별과 수만, 수십만 광년 떨어진 별에서 출발한 별 빛이 지구에 도달하는 시간 등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창조의 세세한 부분들에 대해 정확하게 모른다. 그러나 현대과학이나 우리의 이성적 논리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그러한 난제들을 거부하거나 비성경적 입장에서 재해석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려면 먼저 성경에서 모든 설명을 얻어낼 수 있어야 한다는 집착을 버려야 한다. 성경은 전문적이고도 과학적인 용어로 쓰여진 책이 아니라 모든 세대 모든 사람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상식적이고도 일상적인 용어로 쓰여진 책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너무 전문적인 창조의 과정을 도출해내고자 시도한다면 이는 창세기 1장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도를 간과하게 되는 것이다. 칼빈은 '성령께서는 천문학을 가르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다시 말해서 가장 단순하고, 전문적인 교육을 받지 않은 일반인들에게 교훈을 내리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일상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선지자들을 사용하심으로써 아무도 그 말씀이 모호하다는 핑계를 대지 못하게 하셨다.' 라고 말했다.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신자의 올바른 태도일 뿐 아니라 지성인의 현명한 자세이다. 억지로 풀려다가 멸망으로 이르게 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10]

3. 일반인들은 어떻게 창조과학에 대해 생각하며, 삶 가운데 적용할 수 있습니까?

창조과학이란, 현존 자연계가 존재하려면 일차적인 원인이 창조될 수밖에 없음을 전재하고, 창조를 믿는 데 방해되어 온 잘못된 과학을 재회복하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창조과학이란 성경에 나타난 창조의 사실을 믿는 데 방해물을 치우는 도구이며, 그리스도인의 모든 활동이 하나님나라 확장에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자체가 무의미하듯이 창조과학 운동도 하나님의 복음전파와 연결 지워지지 않는다면 그 결과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볼 수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진화론의 허구성을 밝혀 내고 타파하는 데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이 과학자나 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진화론은 과학이 아니라 믿음이다. 그것과 싸우기 위해서 과학의 학위가 있을 필요는 없다. 이를 위해 기독교인은 성서적인 창조에 대한 믿음을 굳건히 하여 세계관이 그것에 바탕을 둘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약간의 관심을 통해 쉽게 얻을 수 있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많은 과학적 증거들을 전함으로써 진화론의 벽을 깨고 전도를 효과적으로 행할 수 있다. 창조론적인 복음전도방법은 오늘날 세상에서 복음을 퍼트리는 가장 중요한 방법 중의 하나이다.[11]
[4] 창조론과 과학교육

1. 입학시험에서 진화론과 창조론 중 옳은 것을 골라야 하는 문제가 나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요?

진화론을 ‘믿는다’는 것과 ‘알고 있다’는 것은 서로 의미가 다르다. 만일 “믿느냐?”라고 물으면 “믿지 않는다.대답하면 될 것이고 “아느냐?”라고 물으면 아는 대로 대답하면 될 것이다. 교과서가 진화론을 다루고 있는 현실에서 그것을 배우지 않을 수는 없다. 즉, 문제가 나와도 진화론의 내용이 어떻다는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진화론을 열심히 연구하는 것은 진화론의 잘못을 찾아내는 데 매우 중요한 일이 될 것이다.[6]

2. 창조론은 창세기의 창조기사에 근거해 있는데, 왜 그것이 과학교육에 포함되어야 하는가요?

창세기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종교적 가르침도 그 근거로 삼고 있지 않는 창조론을 ‘과학적 창조론’이라고 하며 이를 통해 성경이나 다른 어떤 형태의 종교도 참조하지 않고, 창조를 지지하는(그리고 진화를 반대하는) 과학적 증거들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방법으로 쓰여진 책이 여러 권 나와 있다. 이들은 논거들로 유전학, 고생물학, 지질학, 열역학, 그리고 다른 과학들을 다루고 있으며, 신학이나 종교는 다루지 않고 있다. 실제로 창조에 대한 과학적인 변호는 우주법칙, DNA, 화석들 그리고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은 다른 과학적 용어들과 개념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근거해 있다. 나아가서 창조론 과학자들은 우주의 기원과 관련된 과학적 증거들을 철저하게 연구하고 있으며, 또한 과학적 자료들이 명백하게 창조모델을 지지하고 진화모델과는 모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4]

3. 창조론과 진화론을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같이 다루려는 노력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국내에서는 그 동안 진화론의 주장만을 실은 생물교과서를 통하여 학생들에게 진화론이 주입되어져 왔다. 1988년 5월에 이화여대의 이양림 교수(동물발생학)와 서울과학고등학교 이광원 교사(생물학)는 1990학년도부터 사용될 고등학교 2종 생물교과서용 검정 심사본을 제출하여 2차 심사까지 합격하였으나, 기존의 진화론적 관점과는 다른 시각으로 기술하였다는 이유로 교과서 심사본 내용 중 생물의 진화 단원에 대하여 대폭적인 수정을 요구한 문교부에 불복, 불합격 처분된 교과서에 대하여 문교부를 상대로 '교과서 검정 불합격 처분 무효 확인 청구소송'을 1990년 2월5일 서울고등법원에 제출하였다. 이 교과서의 내용은 진화론이 절대적 과학적 사실이 아니며 여전히 가설로 남아 있는 진화론의 현재적 입장을 소개한 것이었다.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이후 여러 가지 다방면으로 창조론 교육을 모색하고 있으며, 99년 8월 창조 과학 교사연합회를 결성하여 현직 교사를 직접 교육하는 방향으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 일환으로 2000년도에는 교육청에 특수분야 연수기관 지정신청을 교육청에 상정하여 현직교사를 대상으로 창조과학연수를 실시하게 되었다. 하루라도 빨리 올바른 교육이 정착되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하나의 과학적 주장으로서의 진화론의 문제점을 올바르게 인식케 하고 그들의 자유로운 과학적 사고에 장차 올바른 판단과 검정을 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13]
[5] 진화론의 영향은 어디까지?

1. 다윈의 종의 기원이 마르크스의 공산주의 이론에 영향을 주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까?

마르크스는 다윈의 '자연선택', 혹은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을 경제학에 사용한 대표자라고 할 수 있다. 1859년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표된 지 14년 후 1873년 칼 마르크스는 그의 저서 '자본론'의 속표지에 이렇게 썼다. '다윈 선생께, 그분을 진심으로 숭배하는 칼 마르크스로부터.' 진화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사람들 중에 하나가 바로 칼 마르크스인 것이다. 마르크스가 그의 동료인 엥겔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자연환경에서 생물의 경쟁에 관한 다윈의 생각은 계급들간의 경쟁과 관련된다고 하고 있다. 그는 '생존경쟁'의 개념을 '계급투쟁'이라는 말로 바꾼 것이다.[12,15]

2. 현대 교육의 개척자라고 불리는 듀이는 인간이 정신적으로도 진화해 왔다고 주장했는데 그 설명이 맞습니까?

교육학에서 현대교육의 개혁자라고 할 수 있는 듀이는 인간을 육체적, 정신적으로 서서히 진화해 온 산물로 보았다. 진화론적 사고 방식을 강조한 듀이는 환경이 진화를 일으켰다고 주장하고 환경이 교육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주장하였으며, 환경론은 오늘날 학교에서 교육 원리와 정책 개발에 가장 유력한 견해가 되었다.[12] 그러나 성경에서는 인간이 진화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타락한 것이라고 선포한다. 인간은 타락 이후 영적, 정신적, 육체적으로 치명적인 손상을 받았으므로 하나님과 분리된 상태에 놓이게 되었고 그러한 상황을 깨닫지도 못하고 하나님을 찾지도 못한다(롬 3:11).
관리자 조회 3,960회 2013-10-16 0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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