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생활 지침서
기독교대한감리회 연천교회
구원파에 관하여(이단교리)

본문

구원파의 교리에 관하여 주요부분을 정리하였습니다.

1. 깨달음으로 구원받는다.

구원파는 깨달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혹간은 믿음과 깨달음이 같다고
말하는데, 구원파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믿음과 전혀 다르다. 실제로 아래 이요한
 구원파측 홈페에지에서 스크랩한 내용은 예정론은 성경을 잘못해서 나온 것이며
 그렇게 잘못 해석할 경우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반면 장로교는 구원파를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두 교리가 동일하다면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 에베소서 1장의 잘못된 해석이 예정론을 낳았고 성경을
한가지라도 잘못 해석하면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이요한 구원파측 홈페이지 내용이다. 예정론이 수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구원파가 말하는 첫 번째 주장은 예수님의 피가 우리 죄를 사하셨음을 깨달으면
 그 순간에 이미 거듭났으며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깨달음
만으로 구원을 받는다면 사이비집단을 제외한 일반기독교와 심지어 예수의
대속을 인정하는 이단들도 다 구원이 있다고 말해야만 할 것이다.

실제적인 예를 들어보자. 구원파에서 깨달음으로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이 후에 불신자가 되거나 사이비집단에 미혹되었다면 그는 구원을 받는가?
 물론 구원파 측에서는 그러한 사람들은 진심으로 깨달은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명 자체가 스스로 자신이 자기의 구원을 단정하는
 자체가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즉 그들의 구원의 조건은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교리를 깨닫는 것이 된다. 그
 깨달은 날을 자신들이 구원을 받은 날이라고 가르치며, 구원받은 날짜에
대해서 "몇월몇일에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데, 일반 기독교의 구원관과
달리 그들은 그 시간을 "깨달았다"고 표현을 하며 지속적인 믿음과 다르다.




그들은 스스로 깨달음으로 구원을 단정한 날짜를 거듭난 날이므로 영적인
생일로서 반드시 기억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구원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고 변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예외사항은
그 날이 오래 되었거나 기억나지 않는 경우일 뿐이다.







2) 깨달음과 믿음의 개념이 다르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견인교리와 구원파가 말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에 의한 구원은
 그 개념이 전혀 다르다. 개혁주의가 말하는 성도의 견인은 스스로가 단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실제로 성령이 내주하여 그 개인의 구원을 보증하고 인도하는
 진정으로 거듭난 참신자를 뜻하기 때문이다. 개신교가 가톨릭 구교로부터
분열되어 나올 때에 그 슬로건이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였다. 다시
 말하여 이 세가지를 부정한다면 개신교라고 말할 수 없다.




믿음은 (1) 지적 요소(지식, 지) (2) 감정적 요소(찬동, 정) (3) 의지적 요소
(신뢰, 의)가 있으며, 연약한 믿음도 있고 장성한 믿음도 있으며 성장하게 된다.
즉 믿음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순간적인 깨달음과는 전혀 다르다.


구원파는 “한번 깨달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기독교의
 믿음의 경우에는 과거에 한번 믿었다고 하여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장로교의 견인교리를 그러한 개념이 아니다. 현재 진행적인 믿음, 즉
현재 믿음으로 그리스도안에 있는 자가 구원을 받는다. 즉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정죄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과거에 한번만 깨달았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경구절은 없다.




“우리는 믿음으로 칭의되고, 중생하고, 그리고 성화되어 구원을 얻지만, 그 믿음
은 계속되어야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웨슬리는 예정된 자의 구원이 아니라,
 믿는 자의 구원을 강조하면서 신앙의 현재성과 계속성을 강조한다”(웨슬리조직
신학, 성광문화사, 198쪽)
 
다시 말하여 구원파가 주장하는 자의적인 깨달음으로 구원을 이미 받았다는
주장은 정통 기독교적인 주장이 아니다. 구원파에서 스스로 깨달았으면 이미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주장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의 구원예정 안에 있다는
주장과 같기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구원파가 자신들의 주장이
 성경적인 증거라고 제시하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영원한 속죄제사”가
 된다는 구절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한번만 깨달으면 영원한
 효력을 갖는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이 단회적인 제사이며
 영원한 대속이라는 의미이다.




3) 죄가 없는가?
구원파는 거듭나면 모든 죄가 없어졌으므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고 가르친다.
과연 거듭난 자는 모든 죄가 없어졌을까? 만약 우리가 예수의 대속으로 모든 죄가
없어졌고 실제로 온전한 의인이 되었다면 성령이 내주할 필요가 없어진다. 죄는
물질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어긋난 문제다. 죄의 삯은 사망이며,
롬 5장과 같이 아담의 죄로부터 온 인류에게 사망이 온 것이다.




즉 우리는 죄가 없어져서 온전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정죄하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 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구원파는 본문을 인용하며 자백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요한일서 본문이
 죄가 없는데도 자백을 하라는 내용인가? 요한일서는 분명히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오히려 죄가 없다고 하면 스스로를 속이고 진리가 그 속에 없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는가?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시32:5)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그렇다면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지 않았을까? 물론 예수
님의 십자가 대속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셨다. 어떤 기독교라도 모두
그렇게 가르친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 교회가 있다면 그곳은 이단일 것이다.
그러나 "죄사함"은 죄가 없어졌다는 내용이 아니라,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겠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죄가 있지만 믿음
으로 인하여 정죄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죄는 죄책과 죄성으로 나누어 진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었다는 것은 죄가
없어졌다는 것이 아니라, 죄책을 사하여 주었다는 것이다. 즉 죄가 있지만, 죄책
(정죄함)을 면제하여 주겠다는 것이다. 또 거듭난 사람도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그것은 죄성, 즉 오염과 부패된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도 자기에게 죄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롬7:21-23)




4. 회개에 대해

구원파는 자신들도 반복적인 회개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구원파의 주장이 아니라는 것을 아마 그들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구원파에서는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만 하면 되고, 그 이후로는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것은 “회개”라는 개념을 모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회개라는 단어는 단회적인 뜻으로만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죄에
대해서 반복적으로도 사용될 수 있다. 회개를 말하는 메타노에오라는 단어는
 “후에...”를 말하는 “메타”와 “마음”을 말하는 “누스”의 합성어로서 변화된
마음을 뜻한다. 즉 방향수정을 뜻한다.

구원파는 회개와 자백을 구별하여 회개는 단회적이라고 주장을 하는데, 구원
파가 자백을 하면 된다는 주장을 하는 배경에는 "죄가 더이상 없다"는 주장과
 “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주장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구원파는 “죄를
지어도 좋다”라고 가르치지는 않지만, 이러한 주장은 죄와 상관이 없이 이미
구원을 받았으므로 실제로 도덕폐기론으로 발전될 가능성을 갖고 있다. 회개
(메티노에오)는 “돌이키는 방향수정”을 말하는데 거듭남 이후에도 인간은 죄를
 지으며 그 죄에 대해서 돌이킨다는 것이 왜 문제가 되는가? 구원파는 왜 회개가
 아니라 자백만 하면 된다고 가르치는가? 아래 내용은 각각의 구원파의 홈페이지
에 있는 실제 내용이다.

 
5. Already but not yet
 성경에서 구원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시제를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며
 “이미 받은 구원”, “현재 걷고 있는 구원”, “장차 궁극적으로 받을 구원”에 대해서
 성경은 모두 말하고 있다. 그러나 구원파는 이미 받은 과거적인 구원만을 뜻하는
 성경구절만을 선택하여 그 구절들만을 강조하여 가르침으로서 불균형적인 구원
관을 가르치고 있다. 성경은 현재적인 시제와 미래적인 시제의 구원을 분명히
말한다.
정민우 조회 1,950회 2015-06-20 11:33

댓글목록

교회명 :연천감리교회 | 담임목사 : 김대성 | 주소 : (486-806) 경기도 연천군 연천읍 연천로 298
전화 : 031-834-0888 | 팩스 : 031-834-0888 | E-mail : kl0816@naver.com
Copyright 2007~2025 연천교회. All Rights Reserved.
Designed by BLESS 031)954-8601